상실의 시대 (삼각관계, 상실, 섹스의 의미)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꽤 오래전부터 책꽂이 어딘가에 꽂혀 있던 소설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한국판 제목으로는 상실의 시대입니다. 제목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직접 펼쳐 읽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솔직히 말하면 당혹감이었는데, 다시 읽고 나서는 그 당혹감이 오히려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상실의 시대 |
삼각관계, 단순한 연애 구도가 아닙니다
이 소설을 두고 흔히 "그저 섹스가 많이 나오는 연애 소설"이라는 평이 돌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친구에게 줄거리를 이야기했더니 "야설 아니야?"라는 말이 돌아왔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로 펼쳤을 때,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삼각관계(三角關係)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삼각관계란 세 인물이 서로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 구도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게 단순히 '두 여자와 한 남자' 수준이 아닙니다.
소설 초반의 삼각형은 와타나베, 나오코, 기즈키로 구성됩니다. 기즈키는 이미 죽었지만 기억이라는 형태로 삼각형의 한 꼭짓점을 유지합니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죽음이라는 상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와타나베와의 관계를 이어갑니다. 이 삼각형은 서서히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의 구도로 무게 중심이 이동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나오코와 미도리가 작중에서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와타나베라는 매개변수(媒介變數)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매개변수란 두 대상이 직접 연결되지 않고 제3의 요소를 통해 관계를 맺는 방식을 뜻합니다. 와타나베의 편지 속에서 미도리의 존재를 알게 된 나오코의 병세가 심해지는 서사 흐름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나오코와 미도리의 차이는 상실을 대하는 방식에서 갈립니다. 나오코는 기즈키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반면 미도리는 아버지를 잃은 뒤 그 상실을 안고 살아가기로 선택합니다. 일반적으로 나오코를 두고 "주체적이지 못하다", "이기적이다"라고 평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너 혼자라도 가줘"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자신은 갈 수 없지만 당신은 갈 수 있다는, 차갑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체념에 가까웠습니다.
소설 속 삼각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와타나베 - 나오코 - 기즈키: 죽음과 기억으로 유지되는 삼각형. 나오코는 과거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 와타나베 - 나오코 - 미도리: 상실을 극복하는 방식의 대비. 나오코는 무너지고, 미도리는 안고 갑니다.
- 와타나베 - 나가사와 - 하쓰미: 사랑에 대한 자세의 차이. 나가사와는 이해를 기다리고, 와타나베는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 와타나베 - 미도리 - 미도리의 남자친구: 미도리의 구애를 촉발하는 얕은 삼각형.
이처럼 소설은 크고 작은 삼각형들을 겹쳐 쌓아 올립니다. 그 삼각형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사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처음 읽을 때는 잡다하게 느껴졌던 인물들이, 두 번째 읽을 때는 각자의 역할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 소설은 한 번 읽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소설 속 상실, 꼭 거창한 사건이어야 할까요
상실(喪失)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소설에서는 기즈키의 자살, 나오코의 언니, 하쓰미, 미도리의 부모님 등 죽음을 통한 상실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이 많은 죽음들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덮고 나서 한동안 생각해 보니, 이 반복이 오히려 메시지를 강화하는 장치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 경험을 자꾸 대입했습니다. 수년간 준비했던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십 년 넘게 들고 다니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오래된 인연이 아무 말 없이 끊겼을 때, 그 감각들이 꼭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공허함과 겹쳐 보였습니다. 죽음처럼 거대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상실은 일상 곳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상실이라고 하면 누군가의 죽음이나 큰 이별 정도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그보다 훨씬 작은 일들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작은 상실들에 대해서는 "별 일도 아닌데 왜 그래"라는 식으로 지나치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설 속 나오코가 요양원에 들어간 이유를 단순히 나약함으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설에서 굵은 글씨로 인쇄된 단 하나의 문장이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삶의 일부." 이 문장은 상실도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상실을 완전히 없애거나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오코를 잊지 못하고 회상하는 와타나베처럼, 상실은 기억의 형태로 삶 속에 계속 머뭅니다.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메시지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습니다. 출처: 정신의학신문에서도 상실 경험 이후 애도 반응(Grief Response)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할 때 심리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애도 반응이란 소중한 것을 잃은 뒤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슬픔과 감정 처리 과정을 말합니다. 나오코가 겪은 것을 단순한 나약함이 아닌,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 상실을 극복하는 성장 서사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저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픔을 아픔 그대로 인정하고, 그걸 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방식이 훨씬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섹스의 의미, 야설이라 부르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이 소설을 두고 "야설 아니냐"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분이라면 공감하실 겁니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 그 당혹감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섹스 묘사가 덤덤하고 착실하게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 읽으면서 그 장면들이 서사적 기능(敍事的 機能)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서사적 기능이란 이야기 안에서 특정 장면이 주제나 인물의 심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 것을 뜻합니다.
소설 속 섹스는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고독을 달래기 위한 섹스입니다. 나가사와와 와타나베가 함께 헌팅을 나가거나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나오코가 사라진 빈자리에서 오는 고독을 채우려는 시도로 읽혔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이 장면들이 주인공의 공허함을 설명하는 어떤 대사보다 더 명확하게 그 감각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사랑으로서의 섹스입니다. 나오코가 요양원에 가기 전 와타나베와 함께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와타나베는 이 섹스 이후 나오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나오코는 그 이후 "젖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한 문장이 저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나오코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셋째는 상실을 나누기 위한 섹스입니다. 나오코의 죽음 이후 레이코와 와타나베가 함께하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머리가 멍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거든요. 그런데 장례식(葬禮式)이라는 개념과 연결하니 납득이 됐습니다. 장례식이란 죽은 자를 위한 의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슬픔일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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