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노 요코, 에세이, 인생)
솔직히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열심히'라는 단어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런데 사노 요코라는 일본 작가가 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닌, 그냥 현재형으로 '나는 지금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할머니는 대체 누구일까요.
|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사노 요코, 열심히 살았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
사노 요코는 일본의 그림동화 작가입니다. 그녀가 쓴 책 중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만 해도 열 권이 훌쩍 넘는다고 하니, 결코 게으른 삶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백만 번 산 고양이>, <내 친구 모모> 같은 동화책부터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같은 어른들을 위한 에세이까지 다양한 작품을 냈고, 연애도 여러 번,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솔직히 기대가 컸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주는 통쾌함 때문이었죠.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느리고,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얘기들을 자세히도 적어놓았더군요. 자신의 과거 일상, 이불 속에서 보낸 시간, 한류 드라마에 빠져 지낸 병원 생활까지.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런 내용 자체가 '열심히 살지 않는 생활'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요. 성공이나 성취가 아닌, 그냥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사는 모습. 거창한 목표나 계획 없이 커튼을 발가락으로 젖히고, 이불 속에 파고들어 시간을 보내는 일상. 그게 바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삶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열심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저는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열심히'라는 단어를 너무 강요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계속 그 믿음과 강요는 이어져 왔죠. 시험에서 100점을 받지 못했어도 "네가 열심히 했으면 됐다"는 위로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해서 열심히 살아라"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까지. 이 사회는 끊임없이 치열하게, 열심히 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왜 그래야 할까요. 대충 살면 정말 큰일이 나는 걸까요. 꼭 1분 단위, 10원 단위까지 계산해가면서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야만 좋은 인생일까요. 사노 요코는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나는 타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 때문에 멍해지고 만다. 생활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거늘, 그 종잡을 수 없는 것 속에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잣대로 자신을 재면서 거의 대부분 병처럼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완벽주의 성향(Perfectionism)'이라고 부릅니다(출처: WHO 정신건강 섹션). 완벽주의란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사는 방식이죠. 사노 요코가 말하는 '열심히 하지 않기'는 바로 이런 완벽주의적 강박에서 벗어나자는 제안입니다.
- 식당 테이블에 멍청히 앉아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집 앞의 참억새를 바라보는 시간
- 장식장 안의 물건들을 직각으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마음
- 신주쿠의 노숙자가 부럽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
- 남쪽 섬에서 하루 종일 파파야나 따먹으며 늙어가는 삶을 꿈꿀 수 있는 자유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노 요코가 이불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불을 평생의 아군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불만 있으면 빈곤이니, 실연이니 따위에 슬프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죠. 스무 살 일기장에 '이불만이 내 편이다'라고 쓴 여자. 거지가 되어도 이불만큼은 등에 지고 나가겠다고 생각한 여자. 이 얼마나 솔직하고 인간적인 고백입니까.
열심히 산 뒤에야 보이는 것들
제 생각에 이 책은 결국 '열심히 산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사노 요코의 약력을 살펴보면 이 사람도 그리 대충 산 인생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매우 열심히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정말 많이 열심히 살았다는 걸 그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죠.
그녀는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한류 드라마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겨울 연가>에서 시작해 <가을 동화>, <호텔리어>, <올인> 등 수십 개의 한국 드라마 DVD를 병원 침대에 쌓아놓고 눈만 뜨면 봤다는 겁니다. 그렇게 같은 자세로 텔레비전만 보다가 턱이 완전히 삐뚤어졌다는 진단까지 받았다고 하니, 이게 바로 '열심히 하지 않는' 삶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나보다 10살, 20살 어린 친구들이 아둥바둥 인생을 풀어나가려고 할 때, 그 비슷한 걸 겪어본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줄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부질없는 걸 그때는 왜 그리도 열심히 했던 걸까, 자문하게 되는 것처럼요. 사노 요코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열심히 살아본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될 때가 왔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제가 이 책에서 발견한 역설은 이겁니다. 열심히 산다는 게 꼭 사회적 성공이나 돈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열심일 수 있다는 겁니다. 사노 요코는 겉으로는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게 이불 속에 파고드는 것이든,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것이든, 쓸데없는 일상을 글로 쓰는 것이든 말이죠.
책을 다 읽고 나서 저는 중간에 너무 지루해서 책을 그만 읽을까 고민했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뭐랄까, 슴슴한 무염 크래커를 먹는 기분으로 멍하니 책을 한 장씩 넘기게 되더군요. 그게 바로 사노 요코가 의도한 독서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빠르게, 열심히 읽는 게 아니라 느리게, 멍하니 읽는 경험 말이죠.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라는 단어에 대한 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열심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을 이분법으로 나눴다면, 지금은 열심히 사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열심히 사는 것도 있지만, 자기 방식대로 느리게 열심히 사는 것도 있다는 거죠. 사노 요코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은 우리에게도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걸 상기시켜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빠르지 않아도,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요. 이불 속에 파고들어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것 나름의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 참고: https://50plus.or.kr/fpp/detail.do?id=53663 https://www.who.int/health-topics/mental-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