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소설 후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성경 차용, 과학적 비약)

20대 시절 친했던 형이 "이거 정말 재밌다"며 건넨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이었습니다. 그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기만 했는데,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맨 처음 손에 잡은 책이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솔직히 2광년이라는 거리를 날아가는 우주선 이야기라는 설정 자체가 처음엔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더군요.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왜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할까

본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가 있다면, 단연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타고난 글쟁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툴루즈 제1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국립 언론학교에서 저널리즘(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을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과학 잡지에 개미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다가 드디어 그 유명한 소설 '개미'를 세상에 내놓았고, 순식간에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프랑스의 천재 작가로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개미'가 아니라 '파피용'이었는데, 읽고 나서 "아, 이 사람은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한국인 캐릭터가 자주 등장하는데, 한국 팬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성경 요소를 차용한 2광년 우주 여행 이야기

파피용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항공우주국 엔지니어 '이브'는 세계적인 요트 선수이자 미모로 유명한 '엘리자베트'를 차로 들이받는 끔찍한 사고를 저지릅니다. 운전면허를 영구 박탈당한 것은 물론, 씻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지구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전쟁, 기근, 자연재해, 환경오염으로 점점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 대신, 2광년 떨어진 새로운 태양계를 발견한 그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지구 탈출 프로젝트를 발의합니다.

여기서 2광년이란 빛의 속도로 2년을 가야 도착하는 거리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시속 200만 킬로미터로 날아가도 1000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거리입니다. 처음엔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되었지만, 괴짜 억만장자 '가브리엘'이 그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며 후원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우주선 '파피용'이 만들어지고, 14만 4천 명의 사람들이 선발되어 지구를 떠나게 됩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우주선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었습니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떠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주선 내부는 내전과 권력 다툼으로 피폐해집니다. 저자는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은 과연 환경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을까?" 제 경험상 이런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1. 우주선에 타는 인원은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숫자로 설정되었습니다
  2. 약 1200년이 흐른 뒤, 우주선에는 단 6명의 생존자만 남게 됩니다
  3. 새로운 지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최초의 인류 '아담'과 '이브'가 됩니다
  4. 여성이 뱀에 물려 죽자, 남성은 자신의 갈비뼈를 뽑아 새로운 여성을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의 창세기 내용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명확해집니다. 작가는 인류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시 시작을 하나의 순환 구조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처음 이 결말을 읽었을 때는 "아니, 이게 어떻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야?"라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꽤나 기발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과학적 비약이 거슬렸던 공대생의 시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는 항상 그럴듯한 과학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파피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주선 설계, 광속 항해, 냉동수면 기술 등 다양한 과학 기술이 등장하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하지만 공대를 나온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스스로 갈비뼈를 뜯어내는 장면은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골수(骨髓)란 뼈 속에 있는 조직으로, 혈액 세포를 만들어내는 조혈 기관입니다. 이것을 이용해 인간을 만든다는 설정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공자궁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골수만으로 완전한 개체를 복제하는 것은 현재의 과학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작가가 성경의 내용을 소설에 끼워 맞추기 위해 과학적 논리를 무리하게 비틀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어디까지 이 상상이 이어지나" 보고 있었는데, 결국 논리적 한계를 넘어서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소설이란 것이 원래 얼토당토않은 스토리를 가져가는 것도 하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개연성은 지켜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으며, 어떤 환경에 놓이든 악함을 기반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것도 사고였고, 여자 주인공은 자신에게 사고를 입힌 남자를 죽도록 저주합니다. 우주선에 탄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자 서로를 죽이고 배제하며, 결국 6명만 살아남습니다. 중간에 잠깐 행복함이 있었을 뿐, 그 과정은 피곤하고 지리멸렬한 대립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으면서, 작가가 독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계속 던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변할 수 있을까?" "새로운 환경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이 책장을 넘기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한 SF 소설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작품이었으니까요.

파피용은 끝없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 어딘가에서 2광년 떨어진 새로운 지구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그 사이를 그려냅니다. 별 어려움 없이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혼란과 전쟁, 공포와 혐오로 가득 찬 지구를 벗어났지만, 결국 우주선 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이 소설은 익숙한 소재를 낯선 방식으로 풀어냈고, 다시 익숙한 결말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특유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과학적 엄밀함을 포기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추천할 수 있을까요? 과학적 논리보다 이야기의 흐름과 메시지를 중시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디테일에 민감한 독자라면, 몇몇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책을 읽는 재미는 독자가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blog.naver.com/ssobookk_turtle/223482218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