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을 의지 부족이라고 자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광안리 바닷가를 하루에 한 번씩 걸으면서, 변하지 않는 바다 앞에서 왜 저만 이 모양인가 싶어 한숨을 내쉬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손에 잡은 책이 정신과 의사 설경인이 쓴 《나를 지키는 용기》였고, 읽고 나서 무기력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무기력은 의지 문제가 아니라 보호 반응입니다
많은 분들이 무기력을 느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왜 이것도 못 하지”,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이래”라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출발점부터 다르게 봅니다.
저자는 무기력이 사실 내면의 자기보호 반응(Self-protective Response)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보호 반응이란 심리적 위협에 노출되었을 때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려고 몸과 마음이 스스로 움츠러드는 방어 기제를 뜻합니다. 가시덤불 속 작은 동물이 몸을 웅크리는 것처럼, 무기력은 나쁜 버릇이 아니라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는 시각입니다.
저자 설경인은 정신과 의사임에도 직접 복합형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갖고 살아왔고, 어린 시절 학교 폭력과 따돌림을 경험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공황발작(Panic Attack)을 겪었습니다. 공황발작이란 심한 공포감과 함께 심박수 급상승, 호흡 곤란 등의 신체 증상이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책 곳곳에 녹아 있어서, 심리학 이론서가 아니라 비슷한 고통을 겪어온 사람이 쓴 글처럼 읽힙니다. 제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도 사실 그것이었습니다. 어설픈 위로보다 비슷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 더 귀에 들어오거든요.
자기공감이 치유의 첫 번째 경로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라”는 조언입니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저도 한때 이 말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하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감정은 다짐으로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기공감(Self-compassion)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자기공감이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부정하지 않고, 지금 느끼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머무르는 태도를 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친한 친구에게 하듯 따뜻하게 대하는 연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개념은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의 연구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자기공감 수준이 높을수록 우울과 불안이 낮아진다는 임상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Center for Mindful Self-Compassion).
제 경험상 이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광안리를 걸으면서 과거의 힘든 기억들을 일부러 떠올려보려 했는데, 처음에는 바로 다른 생각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다 마음챙김 명상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피하고 싶은 감정일수록 오히려 충분히 느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외면할수록 그 감정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더 강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이 책이 말하는 자기공감의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감정과 생각의 악순환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가 우울과 우울감을 구분하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우울증(Major Depressive Disorder)과 일상적인 우울감을 혼동하지 말라고 짚습니다. 우울증은 진단 기준을 충족하는 임상적 상태이고, 우울감은 그 감정 자체에 대한 반응과 해석, 즉 감정에 대한 감상(Emotional Appraisal)에 가깝습니다. 감정에 대한 감상이란 어떤 감정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지의 과정을 말합니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하냐면, 감정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다시 감정을 자극하는 인지-감정 악순환(Cognitive-Emotional Cycle)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악순환 고리란 부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생각을 부르고, 그 생각이 다시 더 강한 부정적 감정을 만드는 반복 패턴을 가리킵니다. 이 고리를 끊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조언을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책에서는 우울한 사람에게 “다들 극복해, 너도 할 수 있어” 같은 긍정적인 말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좋은 말이 왜 해가 되냐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맞습니다. 무기력 속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들으면 “남들은 하는데 나는 못 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거든요. 공감 없는 응원은 비교의 칼이 됩니다.
악순환 고리를 끊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저자는 단계적인 행동 변화를 제안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저는 그 시절 하루에 30분 밖으로 나가 걷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단 하나의 작은 행동이 나쁜 순환을 끊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래는 이 책이 제안하는 변화의 순서를 제 방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 지금 느끼는 감정을 판단 없이 인식하기 (감정 이름 붙이기)
- 그 감정이 어떤 과거 경험이나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기
- 자책 대신 자기공감의 언어로 스스로에게 말 걸기
- 하루 한 가지, 몸을 움직이는 작은 행동으로 습관의 고리 바꾸기
마음챙김 명상이 이 책을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저자 설경인은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을 이수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MBSR이란 1979년 존 카밧진(Jon Kabat-Zinn) 박사가 개발한 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으로, 현재의 경험에 판단 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명상 훈련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 접근법은 현재 우울증, 만성 통증, 불안장애 치료에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여러 임상 연구에서 효과가 확인되었습니다(출처: UMass Memorial Health Center for Mindfulness).
제가 마음챙김과 명상 자료를 많이 찾아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지우려 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힘든 기억이 올라올 때 외면할수록 그 기억은 해결되지 않은 퀘스트처럼 계속 알림을 보냅니다. 제대로 느껴주고 나서야 비로소 그 기억이 힘을 잃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책도 같은 맥락에서, 내면을 외면하지 말고 천천히 직면하라고 말합니다.
마음챙김 계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계실 텐데, 그런 분들이 읽어도 이 책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지나치게 영적이거나 추상적인 언어 대신, 정신과 임상 현장에서 쌓인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오히려 더 잘 읽힐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결국 이것입니다. 지금 당장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용기라는 것입니다. 무기력과 자책 속에 있는 분이라면 거창한 계획보다 하루에 딱 하나, 몸을 움직이는 작은 행동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그게 광안리를 걷는 30분이었고, 그 작은 시작이 결국 나쁜 순환을 끊는 첫 번째 균열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독서 소감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심리 치료나 의학적 조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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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blog.naver.com/sandhya/223575106740